자신을 드려다보니 내 안에 불편한 감정이 너무 많이 자리하여
이 미성숙한 모습이 제법 안타깝게 다가옵니다.
왜곡되고 굴절된 인식과 의식들로 인해 일어나는 상한 감정들이
내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어쩌면 나를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설정한 여러 기준 때문이며,
이러한 이기적인 잣대로 사람과 상황을 분별하기 때문일 수 있음을 자각하기에 그렇습니다.
내면의 감정을 의심해 보았습니다.
정말 이 감정이 타당한 것인가?
저는 서술형 언어를 어려워하고 그래서 함축된 언어를 빈번하게 사용합니다.
그러다보니 때때로 ‘잘못된 의사소통’으로 이어져 갈등을 빚고
상대와도 전혀 의도치 않은 불편함을 갖게 됩니다.
‘편향적으로 기우는 자신’을 느끼는 것이 더욱 큰 불편함입니다.
사유와 언어를 통한 반성과 함께 자신에게 솔직하여야 겠다는 다짐을 하지만,
이내 가슴속에 자리하고 있는 ‘부정적 상처’들이 고스란히 살아나
‘치유되지 않은 상처’를 원색 그대로 드러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감정에 도취’되어 그 ‘감정에 충실’하려는 미성숙한 제가 또 있습니다.
‘속에 있는 아픔과 상처를 자꾸 인식’하다보면 괴로워지는 것은 제 자신임을 앎에도 말입니다.
이럴경우 두가지 행동으로 상황을 대처합니다.
하나는 ‘화’를 냅니다.
불평하고 힘든 기색을 합니다.
또 하나는 조용하게 말이 줄어들고 ‘침묵으로 회피’합니다.
그 상황을 무심히 무시하는 듯한 행동입니다.
이렇게 나의 감정을 성찰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러한 불편한 감정들을 처리해야 할까?
우선은 “자신에게 솔직”하여야겠지요!
그 솔직함으로 “자신과 대화”가 필요하겠지요!
그리고 그 감정의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겠지요!
그리고 상한 감정을 치유하기 위해서는
누군가와 ‘느끼는 감정을 솔직하고 진솔하게 나누면 그저 쉬울 것’ 같습니다. 만약, 상대가 동일시된 감정으로 공감하려 들지 않는다면 쉽지 않지만 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 자신을 위해서라도 상대와 관계없이(자녀이든 부모이든 그 누구이든)
그들을 “사랑”으로 대하는 것입니다.
상대가 몰라줘도 괜찮습니다.
그런 성숙함이 나를 아름답게 합니다.
“사랑”은 모든 허물을 덮습니다.
나의 허물도 덮는 놀라운 신비입니다.
그렇게 사랑하게 되면 오히려 내 안의 상처와 아픔 그리고 불편한 감정들이 치유됩니다.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케 하게 때문입니다.”
- 글쓴이 : 목회컨설팅 연구소 김성진소장 -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롬 5:8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