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단히 오래전 하루키가 쓴 [상실의 시대]를 읽었습니다.
‘상실’, 묵혀두었던 오래된 단어를 다시 끄집어 냅니다.
상실은 ‘잃어버림’입니다.
지난 삶을 돌이켜보면 상실의 연속이었습니다.
막연하지만 뭔가를 잃어버림에 대한 눌림이 지긋이 느껴지는 듯합니다.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준 상실과 불안감도 여전히 저만치 깔려있습니다.
코로나 이전과 이후 시대로 나뉨은 역시 거대한 상실이 예견되기 때문일 것입니다.
잃어버린 것은 잊어버리든지, 새로운 것으로 대처하든지 해야겠지요.
그러나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좁은 장의자로 한치의 간격없이 앉아 강단을 응시하는 성도들의 모습.
얼굴과 얼굴을 바라보며 섬기던 많은 사역들.
이러한 귀중한 것들을 잊지 못합니다.
그래서 다시 그 시절로 돌아가길 간절합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상실’을 감지했다면, 이젠 현실을 직시해야만 합니다.
그러지 못하면 현실적인 대안을 찾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상실’은 공허감과 우울함까지 낳아 우리에게 안겨 줍니다.
그러기에 ‘상실’을 조속히 받아드리고 수용해야 합니다.
그리고 대안을 찾고 또! 더 나은 대안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합니다.
모든 ‘문제’는 예외없이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에 대한 ‘시사점’이 반드시 있습니다.
문제가 있는 곳엔 반드시 대안도 있는 것입니다.
대안은 ‘전략이며 지혜’입니다.
대안을 만들기가 어려울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간단히 생각할 것들 몇 가지로 지혜를 나눕니다.
경기하는 선수는 자신의 포지션에서의 역할과 직전의 선수의 움직임 정도 읽지만
밖에 있은 감독과 코치는 전체를 봅니다.
그래서 ‘전략가의 도움’이 첫째입니다.
그리고 나름대로의 대처방안 A plan, B plan을 설정해서 작은 임상을 해보십시오.
이 때 중요한 것은 ‘문제해결에 대한 적합성’입니다.
이것이 둘째입니다.
무엇보다 ‘본질’에서 생각해야 합니다.
예배의 본질, 목회의 본질, 신앙의 본질, 양육과 훈련의 본질, 교회의 본질,
모임의 본질, 목양의 본질, ‘본질’이 세번째 입니다.
융합은 시대의 흐름이 아닌 필연적 필수입니다.
‘융합적인 목회’ 구현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복합과는 다릅니다.
융합할 것들을 살펴보고 넓고 높게 바라보는 시각으로 끊임없이 바라보십시오.
‘융합의 구현’이 넷째입니다.
상실의 두려움과 염려를 뒤로하고,
진지하게 내일을 준비하며,
상실 이후 다가올 것들에 대한 대안을 함께 마련하는 마음으로 묵상과 지혜를 나눕니다.
오늘, 지금! 우리의 움직임이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 글쓴이 : 목회컨설팅연구소 김성진소장 -
“사울이 다윗의 크게 지혜롭게 행함을 보고 그를 두려워하였으나”
사무엘상 18:15 |